해동성국 발해, 고구려의 계승과 독자적 발전
한반도의 역사에서 해동성국 발해는 독특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건국되어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에서 약 230년간 존속했던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한 국가였습니다.
'해동성국'이라 불릴 만큼 번영을 누렸던 발해의 역사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흥미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고구려와의 연관성은 어떠했는지, 어떻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갑작스럽게 멸망했는지 등입니다.
이 글에서는 발해의 건국부터 멸망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며, 그 역사적 의의와 한국사에서의 위치를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발해의 정치 제도, 문화, 대외 관계 등을 탐구함으로써, 우리는 동북아시아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동성국 발해의 건국과 성장
해동성국 발해는 698년 고구려 출신 대조영에 의해 동모산에서 건국되었습니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당의 통제가 약해진 틈을 타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중국의 역사서 구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조영은 그 무리를 이끌고 영주로 옮겨 와 살았다... 대조영은 마침내 그 무리를 이끌고 동모산에 성을 쌓고 살았다."
이 기록을 통해 당나라에서도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 국가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해의 왕조
발해 왕족의 성씨는 대씨였으며, 귀족 명단에는 고구려 왕족의 성씨인 고씨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주요 왕들의 업적>
1. 무왕 (재위 719-737) : 대조영의 아들로, 이름처럼 호전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당나라를 공격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2. 문왕 (재위 737-793) : 무왕과 달리 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당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신라와도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수도를 상경성으로 옮기고 통치 체제를 정비했습니다.
3. 선왕 (재위 818-830) : 발해의 전성기를 이끈 왕으로, 옛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했습니다. 이 시기에 발해는 '해동성국 발새'(바다 동쪽의 강성한 나라 발해)라 불릴 정도로 번영을 누렸습니다.
발해의 고구려 계승
해동성국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중요한 부분이니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1. 국서의 표현 : 발해 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를 '고려 국왕'이라고 칭했습니다. 일본 역시 발해를 '고려'(고구려)라고 불렀습니다.
2. 지배층의 구성 : 발해의 지배층에는 고구려계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왕족인 대씨와 고씨 등이 사회의 핵심을 이루었습니다.
3. 온돌 문화 :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적 난방 방식인 온돌을 계승했습니다. 러시아 연해주의 콕사로프카 유적에서 발견된 발해 온돌 유적이 이를 증명합니다.
4. 문화유산
- 상경성 절터에서 발견된 6.3m 높이의 석등은 광개토대왕릉비와 비슷한 크기로, 고구려 양식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 이불병좌상(두 부처가 나란히 앉은 모습의 불상)과 기와의 무늬, 제작 기법에서 고구려 양식이 엿보입니다.
- 정혜공주 무덤의 돌사자상은 고구려의 웅대하고 강인한 문화적 특징을 반영합니다.
발해의 대외 교류
해동성국 발해는 주변 국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국가 발전을 도모했습니다.
1. 당과의 관계 : 초기에는 대립 관계였으나, 문왕 때부터 우호적인 관계로 전환되었습니다. 당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2. 신라와의 교류 : '신라도'라는 교통로를 통해 경주까지 왕래했습니다.
3. 일본과의 교류 : 당과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일찍부터 활발한 교류를 진행했습니다.
4. 거란과의 관계 : 교류가 있었으나, 결국 926년 거란의 침입으로 발해가 멸망하게 됩니다.
발해의 정치 제도와 문화
해동성국 발해는 당의 제도를 참고하면서도 독자적인 특징을 유지했습니다.
1. 중앙 정치 조직 : 당의 3성 6부제를 도입했지만, 명칭과 운영 방식에서 독자성을 유지했습니다.
- 3성 :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
- 6부 : 충, 인, 의, 지, 예, 신부
2. 수도 구조 : 상경성은 당의 장안성을 참고했지만, 독자적인 특징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주작대로의 구조가 장안성과 유사했습니다.
발해의 멸망
해동성국 발해는 926년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했습니다. 전성기를 맞은 지 100년도 채 되지 않아 무너진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거란은 발해의 멸망에 대해 "마음이 갈라진 것을 틈타서 싸우지 않고 이겼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는 발해 내부의 분열이 멸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음을 시사합니다.
결론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한 국가였습니다. '해동성국'이라 불릴 만큼 번영을 누렸지만, 내부 분열과 외부 침략으로 인해 짧은 기간 동안만 존속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해는 한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역사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합니다.
발해의 역사는 우리에게 국가의 내적 단결과 외교적 균형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또한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외부 문물을 수용하는 유연한 자세가 국가 발전에 중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앞으로도 해동성국 발해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히 이루어져, 우리 역사의 빈 공간을 채우고 동북아시아 역사의 전체적인 모습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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